무현금 보석금이란: 유전무죄를 끝낼 수 있을까?
Contents Table
함께읽으면 좋은 글 : PC주의란
“돈이 없으면 유죄, 돈이 있으면 무죄.” 우리는 이 말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사자성어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사법 시스템이 가진 오래된 딜레마이자 불신의 근원이었습니다. 만약 똑같은 혐의를 받는 두 사람이 있다면, 한 명은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풀려나 자유롭게 재판을 준비하고, 다른 한 명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차가운 구치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과연 공정한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 중 하나가 바로 무현금 보석금(Cashless Bail) 제도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뜨거운 사법 개혁의 중심에 서 있는 무현금 보석금 제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도대체 ‘무현금 보석금’이 뭔가요?
무현금 보석금 제도는 단어 그대로, 피의자나 피고인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구금되지 않기 위해 현금을 법원에 내지 않도록 하는 보석 제도를 의미합니다. 전통적인 보석 제도는 피고인이 재판에 성실히 출석할 것을 ‘돈’으로 담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무현금 보석금 제도는 이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꿉니다.
돈 대신, 법원은 피고인의 ‘위험성’을 평가하여 석방 여부를 결정합니다.
- 재범 위험성: 이 사람이 풀려났을 때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 도주 위험성: 재판에 출석하지 않고 도망갈 가능성은 없는가?
- 사회에 대한 위협: 지역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가?
이러한 다각도의 평가를 통과한 피고인은 현금 담보 없이 석방됩니다. 물론 그냥 풀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전자발찌 착용, 정기적인 보고 의무, 특정인 접촉 금지, 약물 치료 프로그램 이수 등 비금전적인 조건을 부과하여 위험을 관리합니다. 즉, ‘돈’이라는 잣대를 ‘관리 가능한 위험 수준’이라는 잣대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왜 ‘현금 없는 보석’이 필요해졌을까?
이 제도의 등장은 기존 현금 보석 제도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점들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단연 부의 불평등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의 보석금이 책정된 경미한 절도 혐의자가 두 명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A는 그 돈을 즉시 낼 수 있어 불구속 상태에서 변호사와 상의하며 자신의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합니다. 반면 B는 생계가 어려워 1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그대로 구금됩니다. B는 직장을 잃고, 가족과 분리되며, 구치소 안에서 제한된 방어권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B가 잃어버린 시간과 삶의 기반은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금 보석 제도가 ‘가난에 대한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또한,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무현금 보석금은 이러한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고,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시도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닌, 인권과 평등에 대한 철학을 담은 사법 개혁의 핵심 과제인 셈입니다.
한국의 보석 제도와는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한국은?” 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한국에서도 ‘불구속 수사 및 재판 원칙’이 존재하며 보석 제도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무현금 보석금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보석 제도는 법원의 재량에 따라 책정된 보증금(현금)을 법원에 납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물론 현금 납부가 어려울 경우, 수수료를 내고 ‘보석보증보험증권’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는 현금 부담을 덜어주지만, 결국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철학에 있습니다. 한국의 보석 제도는 여전히 ‘금전적 담보’를 통해 피고인의 출석을 보장하려는 성격이 강합니다. 반면, 무현금 보석금 제도는 금전적 능력을 배제하고 오직 ‘위험성’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불구속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미국의 특수한 보석 보증업자(Bail Bondsman) 산업과 극심한 사법 불평등 문제가 무현금 보석금이라는 급진적인 사법 개혁을 추동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감자, ‘무현금 보석금’을 둘러싼 찬반 논란
이처럼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 역시 현실에서는 수많은 논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찬성 측은 무현금 보석금이 헌법적 가치인 평등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키고, 불필요한 구금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세금 낭비, 가정 파탄 등)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의는 돈으로 살 수 없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 측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장 큰 우려는 공공의 안전입니다. 현금이라는 최소한의 족쇄마저 없어지면 피고인들이 재판에 불출석하거나, 석방된 상태에서 추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 일리노이주 등 무현금 보석금을 전면 시행한 일부 지역에서 특정 범죄율이 증가했다는 통계가 나오며 논란이 커지기도 했습니다. 과연 ‘위험성 평가’가 인간의 행동을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론도 존재합니다.
미래의 사법 정의를 향한 질문
무현금 보석금 제도는 아직 완성된 제도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거대한 사회 실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법 시스템의 오랜 병폐인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고리를 끊기 위한 담대한 시도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 안전이라는 또 다른 가치와 충돌하며 수많은 과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우리에게도 무현금 보석금 논의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우리의 보석 제도는 과연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불구속 재판의 원칙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는가? 이러한 낯선 개념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법 정의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