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실존주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않는 자유
처음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의외로 “저는 음감이 없어서요”일 때가 많습니다. 아직 건반을 눌러 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미리 정해 두는 것이죠.
그런데 몇 달 뒤 손가락이 음계를 더듬어 가는 모습을 보면, 음감이 없다던 그 선언이 사실이 아니라 핑계에 가까웠음을 알게 됩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바로 이 지점, 사람이 자신을 미리 규정해 버리는 습관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남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통찰이 왜 공부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지를 악기 앞의 그 머뭇거림에서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뜻
사르트르는 1945년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에서 종이칼 하나를 예로 듭니다. 종이칼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종이를 자르는 도구”라는 쓰임새가 정해져 있습니다.
장인은 그 쓰임새, 곧 본질(essence)을 머릿속에 그린 다음 비로소 칼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도구나 물건은 존재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가 먼저 결정됩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사람만은 거꾸로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먼저 세상에 실존(existence)하고, 그 뒤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죠. 이 뒤집힘을 압축한 말이 바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입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 미리 쓰인 설계도는 없다
물건에는 설계도가 있지만,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손에 쥐어진 설계도가 없습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채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서늘하게 들립니다. 나를 설명해 줄 정답지가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는 지금부터 내가 내리는 선택들이 쌓여서 정해집니다.
합창단에서 한동안 가장자리에 서 있던 단원이 어느 날 솔로 파트에 손을 든다고 해 봅시다. 그 순간 그는 “노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벗고, 선택을 통해 자신을 다시 그려 나가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두고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합니다. 재능이나 환경이 전부가 아니라, 그 조건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로 선택하느냐가 나를 빚어낸다는 뜻이죠.
자유에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따른다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말은 곧 인간이 철저히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는 강렬한 표현으로 묶어 냅니다.
자유가 선물이 아니라 선고인 이유는, 선택의 결과를 떠넘길 핑계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변명은 정해진 본질이 있다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하는데, 그 가정 자체가 무너진 것이죠.
그래서 실존주의의 자유에는 늘 책임과 불안(anguish)이 따라붙습니다. 내가 선택한 모습이 곧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세상에 보여 주는 셈이라,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무게는 짐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나를 선택할 여지가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수포자라는 자기 규정을 의심하기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자주 쓰는 본질 규정이 “나는 수포자야”, “나는 암기형이 아니야” 같은 말입니다. 이런 문장은 편리한 대신, 노력하기도 전에 결말을 못 박아 버립니다.
사르트르식으로 다시 쓰면, 수학을 포기한 상태는 타고난 본질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려온 선택들의 결과일 뿐입니다. 어제까지 포기했더라도, 오늘 한 문제를 다시 붙드는 선택이 “수포자”라는 규정을 조금씩 지웁니다.
물론 실존주의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된다”는 식의 가벼운 응원은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조건과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그 한계를 어떻게 다룰지는 여전히 내 선택의 몫이라는 것이 핵심이죠.
그래서 자기 규정을 의심하는 일은 막연한 자신감과 다릅니다. “나는 원래 못해”를 “나는 아직 이 방법을 선택해 보지 않았다”로 바꿔 읽는, 아주 구체적인 태도의 전환입니다.
두 가지 태도가 가른 공부의 방향
같은 성적표를 받아 들어도, 자신을 본질로 보느냐 선택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음 한 달은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 구분 | 본질이 먼저라는 태도 | 실존이 먼저라는 태도 |
|---|---|---|
| 나를 보는 눈 | 타고난 유형으로 고정 | 선택으로 빚어지는 과정 |
| 실패를 읽는 법 | 원래 안 되는 증거 | 방법을 바꿀 신호 |
| 책임의 위치 | 재능과 환경 탓 | 지금의 내 선택 |
| 한 달 뒤 모습 | 같은 자리에 머묾 | 조금씩 다른 나로 이동 |
핵심 정리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뼈대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정해진 쓰임새를 안고 태어나는 물건과 달리, 먼저 존재한 뒤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뜻이죠.
그래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규정은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선택을 미리 닫아 버리는 변명에 가깝습니다. 자유의 무게가 버겁더라도, 그 무게야말로 다른 내가 될 여지를 증명합니다.
음감이 없다던 사람이 끝내 음계를 짚어 내듯, 공부에서도 나를 규정하는 문장을 거두는 순간 미래는 다시 열립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본질이 아니라, 지금 어떤 손을 드느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