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남이 짠 계획에서 벗어나는 학습
동네 백반집에는 메뉴판이 없는 곳이 많습니다. 오늘의 정식이 정해져 있어서 자리에 앉기만 하면 반찬이 나오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하죠.
학교와 학원, 부모님이 짜 준 학습 계획에 몸을 맡기는 일에도 비슷한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 편안함의 정체를 짚어 볼 때 길잡이가 되는 것이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1941년에 나온 이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그것을 스스로 학습 계획을 세우는 일에 어떻게 빌려 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책이 다룬 것은 사회와 정치이고, 학습은 어디까지나 비유로 빌려 쓴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메뉴판 없는 정식이 주는 편안함
정식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고르는 수고가 사라지고, 잘못 골라서 후회할 위험도 없습니다.
학습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표가 이미 짜여 있으면 “오늘은 무엇을 공부하지?”라는 고민이 사라지고, 계획대로 하루를 보내면 마음이 놓입니다.
이 편안함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왜 이 시간에 이 과목을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에 내 목소리로 답할 수 없다면, 한 번쯤 멈춰서 살펴볼 이유가 생깁니다.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유가 불안이 되는 순간
에리히 프롬은 독일 출신의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이고,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는 1941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작입니다.
프롬은 근대에 들어 사람들이 전통적인 권위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그와 함께 고립감과 무력감, 불안도 얻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자유를 얻은 대가로 기댈 곳이 사라진 셈이죠.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자유를 스스로 내려놓고 권위에 복종하거나 군중 속에 섞이려 한다는 것이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프롬은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부르며, 나치즘이 일어난 배경과 연결해 분석합니다.
도피의 가장 조용한 모습, 순응
프롬이 든 도피의 방식은 권위주의, 파괴성, 그리고 자동인형처럼 순응하는 것(automaton conformity)으로 정리됩니다. 앞의 둘은 극단적이지만, 마지막 순응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순응이란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의 구분이 흐려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내 생각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주변에서 받아 온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를 학습에 빗대면, 짜 준 계획을 그대로 따를 뿐 이유를 묻지 않는 태도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다만 프롬이 말한 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라서 개인의 공부 습관에 같은 진단을 내릴 수는 없고, 생각을 돕는 비유로만 읽어야 합니다.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
프롬은 자유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간섭과 속박에서 풀려나는 ‘~로부터의 자유’와, 그 위에서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해 나가는 ‘~를 향한 자유’입니다.
앞의 자유만 있으면 허전함과 불안이 남습니다. 시간표라는 틀에서 풀려나도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와 같은 것이죠. 그래서 프롬은 사랑과 일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자유가 채워진다고 보았습니다.
공부로 옮기면 주도적인 학습 계획이 바로 ‘향한 자유’를 쓰는 연습입니다.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던진 질문은 시켜서 하는 공부를 줄이라는 뜻이 아니라, 선택의 이유를 내가 말할 수 있게 만들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손으로 학습 계획을 세우는 순서
큰 틀부터 흔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주어진 계획을 한 칸씩 내 계획으로 바꾸어 가는 방식이 현실적입니다.
먼저 지금의 주간 시간표를 펴 놓고 칸마다 “이건 왜 필요한가”를 한 줄씩 적어 봅니다. 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 칸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질문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 주는 표시입니다.
다음으로 영어를 예로 들면, 이번 달에 부족한 영역이 듣기인지 어법인지를 스스로 정하고 그에 맞춰 시간을 나눠 봅니다. 학원 진도 외에 내가 고른 활동 하나, 이를테면 매일 15분 듣기를 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주일 뒤에 계획이 맞았는지 점검하고 고칩니다. 틀린 계획이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었기에 무엇을 고칠지 알 수 있으니까요.
맡겨 둔 계획과 직접 세운 계획
외부의 도움을 거절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같은 일정표라도 누가, 어떤 이유로 정했는지에 따라 쓰임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 구분 | 맡겨 둔 계획 | 직접 세운 계획 |
|---|---|---|
| 계획의 출처 | 학교, 학원, 부모님이 짠 일정 | 내 점검을 바탕으로 정한 일정 |
| 일정이 틀어졌을 때 | 어디를 고칠지 몰라 막막함 | 이유를 알기에 조정할 수 있음 |
| 마음의 상태 | 편하지만 “왜”에 답하기 어려움 | 고민은 늘지만 이유가 분명함 |
| 성장의 방향 | 주어진 범위 안에 머물기 쉬움 | 필요를 찾아 범위를 넓힘 |
핵심 정리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말하는 핵심은, 자유가 주는 불안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권위에 복종하거나 순응으로 도피한다는 것입니다. 1941년의 이 저작은 사회와 정치를 분석한 책이지만, 그 통찰은 내 선택의 이유를 묻는 질문으로 옮겨 올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짜 준 계획에 기대는 편안함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 계획에 “왜”를 붙이지 않으면 공부의 주인이 자리를 비웁니다. 칸마다 이유를 적고, 부족한 영역을 직접 정하고, 일주일 뒤 고치는 과정이 학습의 주도권을 되찾는 길입니다.
백반집의 정식이 맛있어도, 가끔은 메뉴판을 펴 놓고 오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고른 한 끼가 쌓일 때, 계획은 남이 건넨 것에서 내가 세운 것으로 바뀝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