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밴드 이론, 도체와 반도체와 부도체가 갈리는 이유

에너지 밴드 이론, 도체와 반도체와 부도체가 갈리는 이유

온실의 선반 두 층을 떠올려 보세요. 아래층 선반에는 화분이 빈틈없이 놓여 있어서 화분 하나를 옮기려 해도 둘 자리가 없고, 위층 선반은 텅 비어 있습니다. 두 선반의 간격이 좁으면 화분을 올려 옮기기 쉽고, 간격이 너무 넓으면 아예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죠.

전자가 놓인 상황이 이와 닮았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에너지 밴드 이론은 같은 원자로 이루어진 고체인데도 구리는 전기가 잘 통하고, 실리콘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유리는 거의 통하지 않는 까닭을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에너지 밴드 이론이 필요한 이유

전기가 흐른다는 것은 전자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체 속 전자가 모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실리콘도 유리도 금속처럼 전기를 통해야 하겠죠. 실제로는 물질마다 전기 전도도가 수십 자릿수나 차이 납니다.

이 차이를 “전자가 몇 개 있느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유리 속에도 전자는 구리만큼, 혹은 그보다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몇 개냐가 아니라, 전자가 에너지를 조금 받았을 때 옮겨 갈 빈자리가 있느냐입니다.

빈자리가 있는지는 전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 값의 지도, 즉 밴드 구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도체 공부는 소자 이야기에 앞서 이 지도를 읽는 법에서 시작합니다.

원자 하나의 준위가 밴드로 퍼지는 과정

원자 하나만 따로 떼어 놓으면 전자는 띄엄띄엄한 에너지 값, 즉 에너지 준위(Energy Level)만 가질 수 있습니다. 온실 선반으로 치면 선반이 특정 높이에만 놓여 있는 셈입니다.

원자 N개를 가까이 모아 결정을 만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같은 양자 상태에 전자가 둘 이상 들어갈 수 없다는 파울리 배타 원리(Pauli Exclusion Principle) 때문에, 원래 하나였던 준위가 N개로 미세하게 갈라집니다. N이 실리콘 1 cm³ 속 원자 수인 약 5×10^22개 수준이면 갈라진 준위 사이 간격이 너무 촘촘해서 사실상 이어진 띠, 곧 밴드(Band)로 보게 됩니다.

실리콘 결정에서 밴드가 생기는 흐름

  1. 실리콘 원자 하나는 바깥 껍질에 3s 전자 2개와 3p 전자 2개, 모두 4개의 가전자를 가집니다.
  2. 원자가 결정을 이루면 이 s와 p 궤도가 섞여 방향이 정해진 결합을 만들고, 에너지가 낮은 쪽과 높은 쪽 두 묶음의 밴드로 갈라집니다.
  3. 낮은 쪽 묶음은 가전자 4개씩이 모두 채우고, 높은 쪽 묶음은 절대 영도에서 비어 있습니다.
  4. 두 묶음 사이에는 전자가 가질 수 없는 에너지 구간이 남습니다.

여기서 비유가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온실 선반은 눈에 보이는 위치의 높이지만, 밴드의 높이는 위치가 아니라 에너지입니다. 전자는 결정 안 어디에든 퍼져 있으면서도 에너지로는 이 띠 안에 있거나 이 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전자대와 전도대, 그 사이의 밴드갭

반도체 물리에서 가장 자주 쓰는 세 용어가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전자가 채워진 밴드를 가전자대(Valence Band), 그 위에서 비어 있거나 일부만 채워진 밴드를 전도대(Conduction Band), 둘 사이 전자가 있을 수 없는 에너지 구간을 밴드갭(Band Gap, Eg)이라고 합니다.

전류가 흐르려면 전자가 전기장에서 에너지를 받아 조금 더 높은 에너지 상태로 옮겨 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로 위에 비어 있는 상태가 있어야 하죠. 전자가 가득 찬 밴드는 전류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선반에 화분이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밀어도 옮길 자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흔한 오해부도체에는 전자가 없어서 전기가 안 통한다

부도체에도 전자는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그 전자들이 가득 찬 가전자대에 있고, 바로 위 빈 상태까지의 거리인 밴드갭이 너무 넓어서 옮겨 갈 수 없을 뿐입니다.

밴드갭의 단위는 전자볼트(eV)입니다. 1 eV는 전자 하나가 1 V의 전위차를 지나며 얻는 에너지이고, 300 K의 상온에서 열에너지 척도인 kT는 약 0.026 eV 정도입니다. 이 숫자를 기억해 두면 뒤에 나올 비교가 쉽게 읽힙니다.

도체, 반도체, 부도체를 가르는 기준

도체, 전도대가 이미 채워져 있는 경우

금속에서는 가장 위의 밴드가 절반쯤만 채워져 있습니다. 나트륨 같은 알칼리 금속이 그렇고, 마그네슘 같은 2가 금속은 가득 찬 밴드와 빈 밴드가 에너지 구간에서 겹쳐 사실상 한 덩어리처럼 동작합니다. 어느 쪽이든 바로 위에 빈 상태가 있어서, 약한 전기장에도 전자가 쉽게 옮겨 갑니다.

반도체와 부도체, 밴드갭의 크기 차이

에너지 밴드 이론으로 보면 반도체와 부도체는 절대 영도에서 구조가 같습니다. 가전자대는 가득 차 있고 전도대는 비어 있으며 그 사이에 밴드갭이 있죠. 둘을 가르는 것은 밴드갭의 크기뿐입니다.

실리콘의 밴드갭은 300 K에서 약 1.12 eV이고, 게르마늄은 약 0.66 eV, 갈륨비소(GaAs)는 약 1.42 eV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약 5.5 eV, 반도체 소자에서 절연막으로 쓰는 이산화규소(SiO2)는 약 9 eV 안팎입니다. 값은 문헌과 온도, 결정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반도체와 부도체의 경계는 칼로 자른 듯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흔히 3 eV 안팎을 대략의 기준으로 말하지만, 이는 관습에 가까운 구분입니다. 밴드갭이 넓은 탄화규소(SiC)나 질화갈륨(GaN)이 부도체가 아니라 반도체로 분류되는 것도 이 때문이죠.

온도가 오를 때 반도체와 금속이 반대로 움직이는 이유

열에너지를 받은 가전자대의 전자 일부는 밴드갭을 건너 전도대로 올라갑니다. 전자가 올라가고 난 자리에는 빈 상태가 생기며, 이 빈 상태를 정공(Hole)이 대신하는 입자처럼 다룹니다. 이렇게 열 때문에 생기는 캐리어의 농도를 진성 캐리어 농도 n_i라고 하고, 지수 부분만 보면 n_i는 exp(−Eg / 2kT)에 비례합니다.

가상 계산 예시, 밴드갭이 만드는 지수 차이300 K에서 kT를 0.0259 eV로 놓고 지수 항 exp(−Eg / 2kT)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실리콘(1.12 eV)의 지수는 −1.12 / 0.0518 ≈ −21.6이고, 다이아몬드(5.5 eV)의 지수는 −5.5 / 0.0518 ≈ −106입니다.

두 지수의 차이는 약 −84.7이므로, 다이아몬드의 지수 항은 실리콘의 약 10^-37배입니다. 앞에 붙는 계수와 구조 차이는 무시한 값이라 실제 농도 비율은 아니지만, 밴드갭이 몇 eV만 달라도 열로 생기는 캐리어가 천문학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실제 실리콘의 상온 진성 캐리어 농도는 약 10^10 cm^-3로 알려져 있습니다(문헌에 따라 값이 조금씩 다릅니다). 원자 약 5×10^22개 중에서 캐리어가 약 10^10개이니, 원자 약 5조 개에 하나꼴로 전자가 올라간 셈입니다.

온도가 오르면 반도체에서는 지수 함수로 늘어나는 캐리어 수가 압도적이라 저항이 줄어듭니다. 금속은 캐리어 수가 이미 충분하고 거의 변하지 않는 대신, 결정 격자의 진동이 커져 전자가 더 자주 부딪히므로 저항이 늘어납니다. 같은 온도 상승이 서로 반대 결과를 낳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밴드갭이 소자의 성격을 정한다

밴드갭의 크기는 소자의 쓰임새를 정합니다. 좁은 밴드갭은 열로 캐리어가 쉽게 생겨 누설 전류가 늘고 고온에서 동작이 불안해지는 단점이 있고, 넓은 밴드갭은 높은 전압과 온도를 견디기에 유리해서 전력 반도체에 쓰입니다.

밴드갭에는 크기 말고도 모양이 있습니다. 실리콘은 전도대의 바닥과 가전자대의 꼭대기가 운동량 축에서 어긋난 간접 밴드갭(Indirect Band Gap) 구조라서, 전자와 정공이 만나 빛을 낼 때 격자 진동의 도움이 필요하고 발광 효율이 낮습니다. 갈륨비소는 두 지점이 맞아떨어지는 직접 밴드갭(Direct Band Gap)이어서 LED와 레이저에 널리 쓰입니다.

이 때문에 실리콘은 논리 소자에, 화합물 반도체는 광소자와 고주파, 전력 소자에 맡겨지는 역할 분담이 생깁니다. 에너지 밴드 이론이 그려 주는 하나의 지도가 재료마다 어떤 일을 잘하는지를 미리 알려 주는 셈이죠.

세 부류의 밴드 구조 비교 표

구분도체반도체부도체
절대 영도의 밴드 상태가장 위 밴드가 일부만 채워졌거나 밴드가 겹침가전자대가 가득 차고 전도대는 비어 있음반도체와 같음
밴드갭없음대략 몇 eV 이하 (실리콘 약 1.12 eV)더 넓음 (SiO2 약 9 eV 안팎)
상온 전도 캐리어매우 많음적지만 도핑으로 조절 가능사실상 없음
온도가 오를 때 저항증가 (격자 산란)감소 (캐리어 증가)매우 높은 상태에서 서서히 감소
소자에서의 쓰임배선, 전극채널, 접합게이트 절연막, 층간 절연막

핵심 정리

에너지 밴드 이론은 결정 속 전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를 띠로 보고, 그 위에 옮겨 갈 빈자리가 있는지로 전기 전도를 설명합니다. 도체는 빈자리가 바로 곁에 있고, 반도체는 밴드갭이 좁아 열이나 도핑으로 빈자리를 만들 수 있으며, 부도체는 밴드갭이 너무 넓어 건너뛸 수 없습니다.

처음의 온실 선반으로 돌아가면, 선반 사이의 간격이 곧 밴드갭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실제 전자는 위치가 아니라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점만 기억해 두면, 이어지는 도핑과 PN 접합 이야기가 훨씬 수월하게 읽힙니다.

면접 대비 질문

면접 대비 질문온도가 올라가면 실리콘의 저항은 줄고 구리의 저항은 늘어납니다. 이 차이를 에너지 밴드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세요.

[답변 포인트] 실리콘은 밴드갭이 약 1.12 eV로 열에너지를 받은 전자가 전도대로 올라가며, 진성 캐리어 농도가 exp(−Eg / 2kT)에 비례해 지수적으로 늘어 저항이 줄어든다고 설명합니다. 구리는 전도대가 이미 채워져 있어 캐리어 수가 온도에 거의 무관하고, 온도 상승으로 격자 진동이 커져 전자 산란이 늘어나므로 저항이 증가합니다. 실제 반도체도 도핑이 충분한 온도 구간에서는 캐리어 수가 거의 일정하고 산란 때문에 저항이 오를 수 있다는 점까지 덧붙이면 더 정확한 답변이 됩니다.